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고대 그리스 철학자 중 디오게네스가 있습니다. 그는 견유학파로 알려져 있는데, 견유학파는 쉽게 말해 ‘개 같은 삶’을 살자는 주의입니다. 개처럼 자신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따라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야 말로 행복한 삶이며,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관한 인상 깊은 일화가 있습니다. 그의 유일한 노예가 이 주인 밑에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고 도망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얼른 쫓아가서 잡아 오라고 권했지요. 그러자 웃으며 말합니다.
“그가 나 없이 살 수 있는데, 내가 그 없이 살 수 없다면, 노예는 누구인가?”
이런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재물을 소유한다고 해도 오히려 재물이 나를 소유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들을 지키느라 불안해하고, 이것들을 불리느라 바쁘고, 잃을까 봐 잠도 못 자는 것이 아닐까요? 재산이 주인이고, 나는 그 노예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맞게 살 것을 늘 명하십니다. 그러나 주님보다 물질적인 것이 더 위에 늘 위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늘 마음에 새기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당신의 사명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명의 대상은 이렇습니다. 첫째, 가난한 이들입니다. 물질적 빈곤뿐 아니라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는 겸손한 영혼을 가진 이들입니다. 둘째는 잡혀간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로, 죄, 사탄, 질병, 사회적 불의의 멍에 아래 묶인 인간 실존의 해방을 이야기하십니다. 셋째는 눈먼 이들입니다. 육체적 시각장애를 넘어 영적 무지와 어둠 속에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이들의 치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들에게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선포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부유하고 넉넉한 사람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구약이 고대하던 메시아 시대의 구원이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예수님의 인격과 현존 안에서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놀라워하고 또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라면서 인간적인 출신과 혈통의 틀에 예수님을 가둡니다.
우리의 신앙은 과거의 관습이나 미래의 막연한 기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바로 지금 자기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해방과 은총을 누리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세상의 것에 익숙해져서 주님의 참된 현존과 권능을 오히려 제안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세속적인 자기 생각으로 얼마나 많은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을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명의 대상이 곧 우리의 복음 선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참된 은총의 삶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나는 어떤 지식보다도 사람이 중요함을 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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