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1일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 신명 4,32-34.39-40; 로마 8,14-17)
찬미 예수님!
우리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것을 믿습니다.
이 한 분 하느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십니다.
하느님은 하나의 본체를 지니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은 실제로 구별되는 위격입니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의 신비인 것이지요.
신비 중에서도 핵심에 해당하는 신비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자신에 관련된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흐름 안에서 보면 사람들은 그래도 이 신비를 이해해 보려고 시도를 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이 한 분이시긴 한데, 어떤 때는 성부의 모습으로, 어떤 때는 성자, 또 어떤 때는 성령의 모습으로 활동하시는 거라고, 모양만 바뀌는 거라고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우리가 믿는 내용이 아니지요.
또 어떤 이들은 하느님 아버지만이 참된 하느님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보다 좀 열등한, 낮은 존재로 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우리가 믿는 바의 것은 아니지요.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실제로 구별되는 세 위격이면서도 한 분 하느님이심을 믿는 거지요.
인간적으로 보면 성부가 제일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엔 성자, 그 다음엔 성령 순으로 시간적으로나 높고 낮음에 있어서도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같지만, 이것은 우리가 믿는 바의 것이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먼저도 나중도 없고, 높고 낮음도 없고, 같은 흠숭과 같은 영광을 받으시지요.
우리는 잘 이해도 되지 않는 이 삼위일체 교리를 왜 가지고 있는가?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삼위일체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저는 바로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이들이 삼위일체의 삶에 대해 말할 때 사랑을 가지고 말합니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기고, 성자는 성부와 성령께,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 모든 것을 내어 드리며 사랑의 삶을 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의 사랑의 삶은 바로 우리를 그리로 초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기고 의탁하는 사랑의 삶에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것이 쉽나요?
누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을 수 있을까요?
누가 이런 삶에 동참할 수 있을까요?
자기가 이미 그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닐까요?
1독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 2독서의 하느님의 자녀들, 그리고 복음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정말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받은 이들입니다.
독서와 복음에서 이들에게 자신들이 이미 충분한 사랑을 받았음을 일깨워주는 이유는 이들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의 삶을 살아가도록 초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시는데, 세례가 물속에 잠김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미 우리는 그 이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에 푹 잠겼던 사람들이고, 이제 우리 몸에 배인 사랑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의 삶에 동참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하느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다른 이들도 이 사랑의 삶에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초대가 우리가 무엇을 살고 있는지를 점점 더 명확하게 깨닫게 해줍니다.
사랑만이 사랑을 깨닫고 명확히 살게 해줍니다.
우리 안에 이미 푹 잠겨져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며 살아가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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