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4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루카 5,33-39; 콜로 1,15-20)
찬미 예수님!
어제 오후에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학교에서 일하시는 클린팀의 자매님께 온 전화였습니다.
제가 양복바지 하나를 버렸는데, 그것을 당신이 수선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달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전화를 끊고 나서 ‘졸지에 내가 가난한 모습을 한 사제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바지를 버리기 전에 어떻게 할까 며칠 동안 생각하다가 버리기로 결정을 한 것이었거든요.
전에 장례미사를 간 적이 있었는데, 제의를 갈아입는데 한 형제가 “형 바지가 찢어졌어요.” 하고 알려주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엄청나게 찢어졌더라구요.
아마도 차에서 그렇게 된 모양인데 저는 그걸 몰랐던 거지요.
장례미사가 끝나고 뒤를 제의가방으로 잘 가리면서 집으로 돌아온 별로 안 좋은 기억이 있지요.
아무튼 수선해 주시면 감사하게 입어야 하겠지요.
어쩌면 저의 소비욕에 하느님께서 제동을 거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서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나는 모든 것을 바꿀 용의가 있는가?
아니면 나의 삶에 예수님을 그냥 맞아들이고 싶은 것인가?
나는 이미 많은 것을 담았던 헌 가죽 부대에 그냥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맞이하려고 하는가?
나는 지금의 나로서도 충분히 그분을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는가?
아니면 나 자신에 대한 전면적인 개편을 생각하는가?
나는 예수님을 나의 부족한 부분, 공허한 부분을 메우는 데 필요한 무엇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새 옷을 찢어 헌 옷에 대고 꿰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콜로새서는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고, 그분 안에서 존속하고, 그분을 통해서,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나에게도 그런가?
예수 그리스도는 정말 내가 맞이해야할 한분이신 신랑이신가?
신랑이시기에, 신랑과 함께 있기에, 나는 모든 것을 신랑에게 맞출 수 있는가?
신랑과 함께 있으면서도 마치 아닌 것 같은 삶을 살고 있다면, 나에게 이 신랑은 누구이신가?
어떤 의미인가?
이러저러한 물음이 저에게는 저의 온 삶을 당신께 좀 더 집중하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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