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다해)
제 1독서 : 1코린 12,12~14. 27~31ㄱ
복 음 : 루카 7,11~17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루카 7,14)
신부님! 저 면담 좀 하고 싶어요.
몇 년 전에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셨던, 그러나 한때 냉담중이셨다가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하신 한 자매님을 만나서 하소연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이 하신 이야기의 요점은 이렇습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성당에서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은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궂은 일부터 시작해서 본당의 중요 직책까지...
하느님께서 나를 이 봉사직으로 불러주심에 너무나 감사하며 기쁘게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이 다른 누군가와 너무나 친하게 지내면서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그런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 헛소문은 사라지겠지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침묵으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그것 봐. 내 말이 맞지! 그 소문이 사실이니까 그냥 가만히 있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이 분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따돌리는 것입니다. 결국 기쁘게 봉사하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마음에 상처만 심하게 받은 채 지금까지 냉담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중에 그 일이 사실무근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헛소문을 퍼뜨렸던 사람들 중에 누구도 나에게 와서 사과 한 마디 없었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모습에 너무나 실망했다고 하는 이 자매님의 마지막 이야기가 지금도 귓가에 맴돕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흔하게 발생하고 있는 일들이고, 나한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으로 공동체가 깨어지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조금만 다르게 본다면, 조금만 서로를 받아주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힘이 빠지게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죽은 사람이 과부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이 우리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합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은 최대의 불효라고 하는데 이 과부는 얼마나 마음이 괴롭고 외로웠을까요? 더구나 여자 혼자서 살아가기란 너무나 힘든 세상이었습니다. 이런 막다른 상황에 놓여 있는 여인의 울음에 예수님 역시 가엾은 마음이 드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비의 주님, 사랑의 주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을 살고 있는 이 현대에는 어떨까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마음껏 느끼고 계십니까? 못 느낀다면 왜 느끼지 못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과부와 함께 있었던 공동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인의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은 과부의 아픔에 함께 했고, 함께 가엾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가요? ‘나 아니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으로 남의 아픔에 대해서 철저히 무관심하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큰 사건 사고로 인해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함께하고 위로하기는커녕 지금의 상황을 오해하면서 또 하나의 아픔을 추가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목적 없이 시간만 때우기 위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뜻으로 모여 있는 곳 그리고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해 모인 곳에 당신 역시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함께 하지 못합니다. 함께 엮이면 피곤하다는 생각, 나하고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는 생각, 상대방이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은 혼자서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절하 하는 생각 등이 함께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말씀을 지금 이 시대에도 듣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도 가엾은 마음으로 우리의 바람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아멘.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