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 6주간 금요일(가해)
찬미 예수님!
초기 교회 공동체는 그야말로 세상을 향한 ‘왕따’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지닌 가치는 세상의 가치와 너무도 달라 있었습니다. 세상은 똑똑하고 잘 살고 높은 자들이 판치는 곳이었는데, 그들은 정반대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그렇지요? 이기기보다는 져야 하고, 가지기 보다는 내놓아야 하고, 내 뜻대로 하기 보다는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헤아려야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세상을 거슬러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준다는 기쁨이 그들에게 기쁨이 될 수 없었고 세상에서의 즐거움이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도리어 죄가 되고 짐이 되는 경우가 더 많았을 테니까 말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분명 세상 속에서 힘들었지만 그들이 받을 상, 그들이 받을 기쁨은 세상살이가 힘들면 힘들수록 더욱 더 빛이 났을 것입니다. 세상에 상대해서 그들은 확실히 표가 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갈수록 이것이 옅어집니다. 사실 우리 천주교 신앙인들이 그렇습니다. 별로 표가 잘 안 납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매력이기도 하겠지만 신앙적으로 놓고 본다면 뼈아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그 생활이 똑같다는 거, 안 믿는 사람들이 쫓고 바라는 그것을 똑같이 믿는 사람들도 따라가지 못해 안달을 하고, 안 믿는 사람들이 무시하고 폄하해서 바다도 막고, 농토에 철조망을 쳐서 생명이란 생명은 다 죽여 버리고 떠 빨리 살고, 더 소유하며 살고, 더 안전하게 살겠다고 닥치는 대로 죽이고 내쫓고 갈라 세우는 일에,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믿으나 안 믿으나 똑같이 살 때, 오늘 복음은 전혀 우리에게 기쁜 소식으로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기쁨이 너희에게는 근심이 되겠지만 이 근심이 머지 않아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 말씀하시는 그분의 삶이 지금 우리들 안에서 파동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세상의 기쁨을 나도 못 쫓아 안달하며 사는데, 어이 이것이 근심이 될 것이며, 세상의 일 안 풀린다고 오만 근심 다 하는데 이 어이 하느님 안에서 기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오늘 복음이 그야말로 기쁨이 되려면 내가 사는 삶이 세상의 삶과는 좀 많이 달라야 합니다. 세상은 구하지 않는 것을 나는 구할 줄 알아야 하고, 돈만 되면 뭔 짓이라도 서슴치 않는 이 세태에 대하여 가슴 아파해야 합니다. 내 살자고 너 죽이는 일이 얼마나 염치없는 짓인지, 무명의 생명들을 향해서도 눈물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힘 있는 자들 따라가지 못해 안달하다가는 결코 예수님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의 즐거움 나도 채우겠다고 따라 나섰다가는 그 길에서 정말 예수님 만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즐거움, 예수님의 기쁨은 이 세상의 길 정반대 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하는 것에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거슬러 오름에 대한 당당함이 필요한 일입니다.
신앙생활 10년을 하나 20년을 하나 이제 막 세례 받은 사람과 하나 다를 바가 없고, 하다 못해 식당에 가서 성호 긋는 것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어떻게 이 신앙으로 구원 받기를 바라겠습니까?
기왕지사 시작한 신앙생활 아닙니까? 개신교회 신자들은 어디 가서도 자랑스럽게 성경을 펴 듭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어딘가 남다른 데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나는 세상과 이렇게 다르다고 자랑할 수 있는 꺼리가 좀 있어야, 그래야 나도 하느님의 기쁨에 함께 동참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영원한 기쁨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쁨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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