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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6일 _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8-06 조회수 : 332

2018. 08. 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마르코 9,2-10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산 아래로 세상 속으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구세주인 그리스도 예수는 과연 누구입니까?

초인적인 힘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분입니까?

모든 불의와 부정을 단칼에 잘라버리고

순식간에 새 세상을 여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까?

불치병을 씻은 듯이 낫게 하고,

삶의 온갖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도록

특별한 조치를 취하시는 분입니까?


아닙니다.

무력하신 분입니다.

십자가라는 치욕적인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아무 힘이 없으셨던 분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힘없는 이를

우리의 구세주라고 고백합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했다고,

십자가를 따르는 길이 생명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적어도 입으로, 머리로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이와는 반대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굿판에서 불리어지는 온갖 잡신들처럼

구세주께서 현세 생활을 보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당장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당장 아픔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아무런 고통도 없는 삶을 마련해주기를 바랍니다.


아니 그것을 강요합니다.

이렇게 해주셔야만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다고

구세주의 자격을 제시합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십자가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고 예수님께 외칩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만

참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살기 위해 십자가를 내팽개치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꿈꾸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빛처럼 다가옵니다.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

우리가 생각했던 구세주, 바로 그 모습입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이 사람 저 사람에 치여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은 간 데 없고,

환하고 빛나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신 예수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이의

초조함과 절망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빛처럼 당당하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얼마나 든든합니까?


구약 시대를 상징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를 살리실 분이라면,

바로 이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제자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미칠 것 같았던 이들,

밤낮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하던 이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시간을

헤어날 수 없는 절망감 속에

처절한 몸부림으로 지내야 했던 이들,

이제 벅찬 해방감에 젖습니다.

안도의 한 숨을 내쉽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에 대한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실 일에 대한

예수님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의 대화를

잠결에 듣지 못하고

오직 눈앞의 예수님의 빛나는 모습에 도취된

제자들은 환호하며 외칩니다(루카 9,31-33 참조).


스승님,

여기에 머뭅시다.

이대로 삽시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삶이 아니었던가요.

저희가 모든 것을 해 드리겠습니다.

집도 짓고 먹을 것도 마련하고

그저 이 자리에 이렇게만 있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당연한 제안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주님의 뜻이었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아직 머물 때가 아닙니다.

가야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함께 보듬어야 할 이들이 있습니다.

산에서 내려가야 합니다.

산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들,

산에서 보았던 모든 모습들,

영광과 환희가 넘쳐나는 그 모든 것들을

희망으로 곱게 간직하고,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두려움 없이 다시 고통의 길,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지어 바치고자했던

초막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으로 예수님을 만나 힘을 얻은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주님을 모시고

오순도순 살아간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마는

이렇게 편안하게 머물러 있는 것이

예수님의 뜻은 아닙니다.


온 세상에 복음이 울려 퍼지는 것,

가난한 이들,

고통 받는 이들,

빼앗긴 이들,

묶이고 억압받는 이들,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함으로써

이들을 세상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고

주님의 기쁨에 온전히 함께 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뜻이고

십자가를 통해 부활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척박한 땅위의 흙투성이가 되는 아픔을 감수하면서

이 땅의 하느님 나라를 가꾸려 힘차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감으로써만

우리가 오늘 미리 맛 본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삶에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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