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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11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7-11 조회수 : 278

쥐를 생후 첫 몇 주 동안 하루에 15분씩 만져주는 것을 반복하면 만져주지 않는 쥐에 비해서 스트레스를 잘 이겨낸다는 실험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즉, 하루 15분 정도 만져주는 스킨십만으로도 스트레스에 직면했을 때 무기력한 모습을 더 적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또한 생애 초기에 보살핌을 받은 쥐들은 그렇지 않은 쥐에 비해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노화가 야기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잘 극복한다고 하더군요. 과거의 보살핌에 대한 경험이 미래에 사건에 대한 대처 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우리 사람은 어떨까요?”라는 의문을 던지게 되면 대부분이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답변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분은 자신이 어렸을 때 이러한 보살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현재 정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보살핌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의 차이는 분명히 큽니다. 그런데 스스로 그 보살핌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떤 분의 경우는 어렸을 때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말씀하시고, 또 어떤 분은 사랑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말로 학대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역시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사랑을 받을 수 없는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사랑을 많이 받았다면서 기쁘게 사시는 모습을 보이는 분들도 주변에서 종종 보게 됩니다. 결국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에 따라 지금의 모습이 바뀔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면서 병자들을 고쳐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행동의 이유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말씀으로 정리해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먼저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느끼지 못할까요? 바로 ‘나’만을 강조하면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나’라는 단어보다는 ‘너’라는 단어가 더 많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나의 고통보다도 너의 고통에 끝까지 함께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너’의 대상인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인 ‘나’를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큰 사랑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기억하며 만들어가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완성하라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저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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