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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14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0-14 조회수 : 409

2001년에 썼던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벌써 만 18년 전에 쓴 묵상 글입니다. 유치하기도 하고, 이런 내용을 묵상 글이라고 썼다는 사실이 그리고 이렇게 부족한 내용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인터넷에 올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면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어쩌면 오늘 쓰고 있는 글 역시 지금까지 보내온 시간이 지난 뒤에 바라보면 유치하고 부끄럽지 않을까 싶네요.

우리는 성장합니다. 유치함과 부끄러움을 극복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나’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의 감정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감정이라고 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이 역시 극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장하는 나 자신의 모습에서 주님의 놀라운 손길을 깨닫습니다. 주님 안에서 유치함과 부끄러움이 점점 더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된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착각 안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자신의 감정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 나의 모습이 전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지금의 상태로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착각입니다. 바로 전지전능하신 주님을 생각하지 않기에 갖게 되는 착각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쓸모없이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점점 나아질 수 있도록 만드셨고, 이를 통해 당신의 영광이 이 세상 안에 환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과 함께 하는 ‘나’를 통해서도 주님의 놀라운 표징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표징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요? 혹시 눈에 보이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 안에서만 표징이 있다고 여겼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의 말을 듣고서 모두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요나보다 더 큰 분이 이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사람을 꾸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눈에 보이는 표징만을 요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자기 뜻에 따라서 움직이는 마술사 예수님만을 원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주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기적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지금을 사는 우리 안에서 그대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나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특별한 삶 안이 아닌 일상의 삶에서도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을 깨닫는 것보다 큰 기적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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