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심리학자 로버트 M.여키스와 존 D.도스은 갑작스러운 자극이 개인의 생산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실험했습니다. 연구팀은 미로에 실험 쥐를 넣고 약한 전기충격을 주어 스트레스가 미로를 탈출하려는 노력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살폈습니다. 그 결과 낮은 수준의 자극이나 압박은 낮은 성과로 이어졌고, 여기에 좀 더 높은 자극이 가해져 스트레스 수준이 높아지면 성과가 올라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자극으로 불안감이나 긴장도가 너무 높아지면, 성과는 다시 낮아졌습니다.
이 실험 결과를 통해 높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긴장감을 줄 수 있는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극이 없으면 안일하고 편안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자극이 너무 크면 그냥 포기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극이 우리의 삶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고통과 시련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고통과 시련이 있기를 바라고 있나요? 아무런 고통과 시련 없이 편안하고 쉬운 삶만 살기를 바라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의 자극이나 압박이 들어오면 남 탓을 하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누구 때문에 너무 힘들고, 누구 때문에 자신에게 불행의 삶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편안함은 자신이 잘살아서 그런 것이고, 자신의 불편함은 남 때문에 생겼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됩니다. 바로 고해소 안에서입니다. 분명히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남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떤 신부님께서는 고해소에서 제일 많이 고백하는 죄가 ‘남의 죄’와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원하실까요?
자신의 자리에 안주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힘을 쏟아서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또 스스로 죄 없다면서 하느님보다 더 의로운 사람인 척하는 것보다는 진정으로 뉘우쳐서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우리의 모습을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당시에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인정받던 사람은 바리사이였습니다. 그들은 기도, 단식, 자선 등을 실천하면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에 반해 세리는 이방인 로마에 빌붙어 살면서 온갖 비리를 저지르면서 때로는 율법에서 금지하는 것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다인은 이 세리를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가 더 옳다고 하십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며 자기를 드러내는 기도만 하고 있지만, 세리는 진정으로 뉘우치며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기도를 바쳤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기도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당연히 세리의 모습입니다. 이 겸손한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원하시는 변화, 즉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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