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4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
< 그분과의 만남 이후, 비로소 제 인생의 황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
세례자 요한의 급격한 쇠락과 동시에 예수님 주변으로 사람들이 슬슬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세례자 요한의 태도가 참 놀랍습니다.
오랜 기간 공들여 교육시켰던 제자들을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예수님께로 인계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요한 복음 1장 36절)
스승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적을 바꾸어 말을 갈아탄 두 제자는,
전 스승님에게는 송구스럽고, 새로운 스승님께는 어색하고 그랬던지, 쭈볏쭈볏 예수님 뒤를 따라가자, 이를 감지하신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어색함을 깨고 먼저 다가와주신 예수님께 황공해하며 두 제자는 묻습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복음 1장 38절)
복잡한 것을 싫어하시는 분, 요약과 단순명료함의 대가이신 예수님께서는
장황하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딱 한 말씀만 하십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복음 1장 39절)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를 자신의 거처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면서, 그분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겠죠.
거처에 들어가서는 그분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밤늦도록 포도주 잔도 기울였을 것입니다.
비록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두 제자는 점점 예수님께로 빠져들어갔을 것입니다.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언어, 오랜 갈증과 의혹을 말끔히 풀어주는 탁월한 가르침, 깊은 인간적 매력, 따뜻하고 자상한 눈빛, 묘한 신비로움...
두 제자는 밤 늦도록 그분을 떠날 줄 몰랐습니다.
두 제자는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자신들의 눈앞에 계신 이 분이야말로 그토록 고대하던 바로 그분, 메시아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찰라 같은 시간이었지만, 그분과 함께 했던 그 시간이 곧 구원의 시간이요, 천국 체험의 시간이었음도 온 몸으로 깨달았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 세상 둘도 없는 값진 보물을 발견한 두 제자는,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도 뒤로 하고, 애지중지하던 고깃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린 채, 즉시 그분을 따라 나섰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존재 자체로서 풍기셨던 매력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그분을 만난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분과의 만남 이후 자신들의 새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야말로 진정한 인생의 봄날, 인생의 황금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를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도하셨던 초기 교회 공동체의 흘러넘치던 그 생명력, 그 기쁨, 그 환희, 새 하늘 새 땅이 펼쳐지고 있습니까?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은 우리들이 선포하는 말씀으로 인해 위로받고 치유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지나친 폐쇄성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녀야 할 가장 근본적인 속성은 순례성, 개방성, 유연성, 연대성...
이런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어떤 공동체는 세상과의 경계가 되는 담을 너무 높게 쌓아올렸습니다.
어떤 공동체는 마치 대단한 성채, 단단한 철옹성 같아서 감히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어떤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다들 뭐가 그리도 바쁜지 찾아온 나그네를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교회의 문턱이 너무 높습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지상의 나그네를 환대하는 집이 교회가 아닐까요?
목말라하는 나그네에게 시원한 물 한잔과 쉼터를 제공하는 곳이 교회가 아닐까요?
세상과의 전투에서 상처 입은 부상병들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야전병원이나
응급실이 교회가 아닐까요?
사회적 약자들과 날개가 부러진 사람들과 기가 꺾인 사람들이 원 없이 에너지를 충전시킬 수 있는 기쁨과 희망의 에너지 충전소가 교회가 아닐까요?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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