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1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에제키엘 37,1-14
마태오 22,34-40
그릇된 신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릇된 신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역사 안의 여러 인물들이 잘 드러낸 바 있습니다.
그릇된 신념의 소유자들로 인해 선량한 소시민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은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영화 ‘대부’의 실제 인물이었던 이탈리아계 미국인 조폭 두목 알카포네(1899~1947)는 지하 암흑 세계의 일인자로서, 평생토록 도박, 밀주, 매춘, 폭력, 탈세 등등으로 얼룩진 인간 말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성실한 납세자였으며 나쁜 일을 한 적이 없다.”
최근 나라 전체, 국민 모두의 분노 게이지를 한껏 올려놓고 있는 ‘국민 민폐’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남을 죄짓게 만드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셨는데, 그는 지금 존재 자체로 사람들 입에서 자동으로 욕이 나오게 하고, 죄를 짓게 만드니, 그의 미래가 참으로 걱정입니다.
그릇된 신념에 그릇된 종교적 신념이 더해지만 백퍼센트 IS라더니, 전광훈이라는 자가 꼭 그꼴입니다.
그런 자의 뒤꽁무니를 깃발 높이 쳐들고 쫓아다니는 분들의 인생 역시 참으로 불행합니다.
예수님 시대 때도 비슷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과 사사건건 부딪치던 사람들, 아니 거의 일방적으로 예수님을 몰아붙이던 사람들,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원래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서로 번갈아가며 공격했습니다.
때로 합심해서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기를 썼습니다.
오늘 복음에 그런 흔적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마태오 복음 22장 34절)
한없이 부드럽고 온유한 예수님이셨지만 이 사람들 앞에서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공격 앞에 끝까지 대적하시며, 그들의 악행을 낱낱이 고발하시면서,
그들의 회개나 변화를 기대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그릇된 신념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과도한 선민의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위선적인 삶, 타성에 빠진 신앙, 정성이나 영혼이 사라진 예배, 삶 따로 신앙 따로의 이중적인 삶은
점점 더 심각해졌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그들의 하늘을 찌르는 교만이었습니다.
장황하고, 잘난체 하며, 고리타분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과는 동떨어진 경직된 율법주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화의 대가였습니다.
그 어떤 가르침이든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재미있고 감동적인 예를 들면서 설명하셨습니다.
당연히 구름 군중이 몰려왔고, 크게 환호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시기 질투는 커져만 갔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616항이나 되는 율법조항들과 알을 까고 새끼를 친 수많은 규정들을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하시니, 사랑의 이중 계명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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