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 애리얼리라는 행동경제학자가 실험을 하나 했습니다. 두 개의 주사위를 던져서 합친 숫자만큼 현금을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숫자는 본인만 보고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거짓말을 해서 더 많은 현금을 받아간다고 해도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한 뒤에 다시 실험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합친 숫자만큼 현금을 주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이 현금을 피실험자 이름으로 기부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거짓말 탐지기를 설치해서 거짓말을 했는지를 확인해보겠다고 말합니다.
거짓말 탐지기를 설치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진실을 말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숫자 ‘6’이 두 번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짓말 탐지기에서 ‘참’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공동의 선이나 대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거짓말을 해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나 자신을 위한 거짓만 거짓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독재자들의 거짓을 보십시오. 그들은 양심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요?
자신의 행동이 진리라는 착각에서 빠져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특별한 공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자신들과 하느님이 만나는 거룩한 공간이었으니, 이곳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도성을 보고 우십니다. 하느님의 집이라고 하면서도 그 안에 온갖 죄와 악이 물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성전을 정화하시기 위해 채찍을 드셨던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집이라고 해도 하느님의 뜻은 전혀 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팔아 사람들을 더욱더 소외시키고 고통 속에 머물게 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사랑은 완전히 사라진 공간, 이 사랑을 사라지게 한 죄를 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인간의 뻔뻔함과 거짓. 이 모든 모습에 주님께서는 우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그들의 위선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더는 주님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를 위해서는 어떤 순간에서도 진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진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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