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가 어떤 생각이 나서 뭔가를 찾으러 거실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가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기억이 되살아날까 싶어서 다시 사재로 되돌아갔지만 역시 생각나지 않습니다. ‘내 뇌가 퇴화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거실로 나가 두리번거립니다. 내 뇌의 퇴화를 인정할 수 없다며 이것저것을 보며 기억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저만 그럴까요?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한두 번은 이런 일을 겪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2~30대도 겪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주의가 산만해서 그렇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5~60대로 넘어가면 뇌가 쇠퇴하는 징후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뇌과학자들은 기억력 쇠퇴가 암울한 징조가 아니라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젊었을 때는 뇌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뇌는 외부환경에서 비롯되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드는 시간을 줄이고, 대신 자기 자신의 생각을 심사숙고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생각이 많아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뇌과학자들이 말하듯이, 뇌의 퇴화가 아닌 당연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당연한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스스로 갇혀 있는 생각 때문입니다. 불완전하고 나약한 인간 조건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니, 하느님의 사랑까지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더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하게 지금을 인정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심판의 주체는 늘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남을 심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율법이 허락하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했기에 하느님께서는 그 모습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점을 주님께서는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심판하지 않는 행동의 결과인 용서와 자선을 이야기하십니다. 즉, 베풀고 용서해야, 자비하신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임에도 끊임없이 심판하고 단죄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따르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에서 드러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옷은 목에서 발목에 이르는 품이 넓은 옷이었습니다. 담을 그릇이 없을 때, 이 옷은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주신다는 것이지요.
이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영역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모습이 됩니다.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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