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현미경을 처음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 바로 위의 형님이 어디서 빌려왔다면서, 현미경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현미경의 슬라이드글라스 사이에 나뭇잎, 물, 흙 등을 넣고는 현미경 렌즈로 보았습니다. 직접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눈으로 도저히 볼 수 없는 것들이 현미경 렌즈 안에 있었습니다.
내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 배율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것을 볼 수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답이라 할 수 있을까요?
어렸을 때의 이 기억을 떠올리며, 하느님이 비록 내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당연히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현미경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묵상,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믿음이 커지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의 현미경을 장착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나의 눈으로 볼 수 없다며 안 계신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마음의 현미경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했다는 점을 두고 유다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을 삼았다.”라고 전해줍니다. 그리고 이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지 않음으로 인해서 계약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아버지와 하나의 본질이며 당신과 아버지께서 공통으로 지니신 본성에 어긋나는 행동은 할 수 없으므로 당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은 하나임을 보여주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두 분의 본질이 하나임을 증명해 줍니다. 그래서 이런 이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중풍 병자의 치유보다 더 큰 일들을 당신 아들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더 큰 일’이란 하느님만이 지니신 권능, 곧 부활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되살리시는 분으로서 당신께서 아버지와 대등하심을 또다시 확증해 주십니다.
이 주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마음의 현미경 없이는 도저히 주님을 볼 수 없으며, 주님과 함께 할 수도 없습니다.
다비드상에 담긴 이야기
미켈란젤로는 키가 작아서 4m가 넘는 다비드상을 조각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당시 피렌체 행정부의 고위 관리가 미켈란젤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작품은 정말로 훌륭하지만, 코가 지나치게 높고 커서 전체 조각상과 조화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이 기분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작가의 고집을 부려서 화를 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곧바로 날카로운 정을 다비드의 코에 대고 망치질을 했습니다. 망치질과 함께 대리석 가루들이 바닥으로 떨어졌지요. 이 관리는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말을 따르는 미켈란젤로가 정말 고마웠습니다.
사실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의 코에는 손도 대지 않고, 손안에 미리 쥐고 있던 대리석 가루를 조금씩 떨어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의 만족을 가져올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 지혜가 없는 것 같지만, 한 번 더 생각하고 상대방 처지에서 바라본다면 지혜로운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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