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신기하죠. 내 고민엔 갈피를 못 잡고 허우적대면서 남의 고민을 들으면 해답이 너무도 선명히 보이고, 내 집 대청소를 할 땐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데 남의 집 정리하는 거 도와주러 가면 너는 어떻게 그렇게 정리를 잘하냐는 소리를 들으니 말이에요.’(이석원,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중에서)
언젠가 읽은 책의 한 구절입니다. 이 책의 내용처럼,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보지 못하면서 남은 너무나 잘 보는 것 같습니다. 내 눈이 나를 향해 있지 않고 남을 향해 있어서 그럴까요? 그래서 얼마나 많은 비판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비판을 가지고 남을 설득하려고도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서 전문가들이 예측을 쏟아냅니다. 이 말대로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 전문가의 예측은 실제로 50%도 맞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전문가의 말도 정확한 예측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도 이런데 하물며 비전문가인 나의 말은 얼마나 맞을까요?
비판적인 시각이 이 세상을 발전시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비판적인 시각이 행복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먼저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향한 부정적인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이는 그의 겸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먼저 머리에 향유를 붓지 않고 겸손하게 시중을 든 다음에야 그렇게 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런 겸손에서 주님께서 받으실 고통과 시련을 위한 준비가 나오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향유를 붓는 마리아의 모습에 유다는 신심을 가장하여, 자신이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때 그분 목숨에 매긴 값보다 향유를 더 값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주님과 향유를 붓는 마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사랑 행위는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일과 대립하는 행동으로 볼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체로, 곧 그들 곁에 오래 계시지 않을 주님을 영광스럽게 한 행위로 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사랑의 실천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제쳐 놓아서는 절대로 안 되기 때문에 섬기는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선 마리아에게 당신의 몸을 맡기실 수 있었습니다.
부정적인 시각을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보다, 주님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넘어진 덕분에….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아이다 미츠오의 ‘넘어진 덕분에’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진 덕분에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실수와 실패를 반복한 덕분에 조금씩이지만 사람이 하는 일을 따뜻한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몇 번이나 궁지에 몰린 덕분에 인간으로서 연약함과 칠칠치 못함을 진저리가 날 만큼 알게 되었습니다.
속고, 배반당한 덕분에 바보처럼 정직하고 친절한 인간의 따뜻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마주할 때마다 인생의 덧없음과 지금 여기 살아 있다는 사실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맛보게 되었습니다.
넘어진 것도, 쓰러진 것도, 속은 것도, 배반당한 것도 절대 유쾌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부정적으로만 생각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하는 사람만이 새로운 삶을 삽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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