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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소식

교구제3차 한국 순교자 시복시성을 위한 세미나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09-09-24 조회수 : 1140

 지난 19일 교구 시복시성 추진위원회(위원장 이영배 신부) 주최로 정자동주교좌성당에서 ‘한국 순교자 시복시성을 위한 세미나’가 열렸다.

 
 박정일 주교(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의 기조 강연으로 시작된 이번 세미나는 한국 천주교 창설주역(이승훈·권철신·권일신)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이승훈의 교회활동과 신앙고백▲천주교 수용과 전파의 토대를 구축한 권철신·권일신▲사료를 통한 권일신․권철신의 생애 신앙에 대한 재구성▲창설주역의 생애·순교사실·평판에 관한 연구▲창설주역에 대한 시복시성을 위한 교회법적 구성요건▲창설주역의 죽음·순교 문제에 대한 재조명 등 총 6개의 논문 발표와 논평, 그리고 종합토론과 총평(최덕기 주교)으로 마무리되었다.
 
 8시간이 넘게 진행된 세미나에서, 발제자와 논평자들은 초기 한국 교회의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본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 교회활동, 신앙, 순교평판 등에 대해 다루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기여한 이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통해 이들의 시복시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다각도로 폭넓게 논의 했다. 각 발제에 대한 논평은 여진천 신부(배론성지 주임), 차기진 박사(양업교회사연구소), 조광 교수(고려대학교), 장동하 신부(가톨릭대학교), 배달하 신부(원주교구 대화성당), 김성태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등이 맡았으며, 종합토론 사회는 배영호 신부(평촌본당 주임)가 진행했다.   
 
 이날 축사에서 교구장 이용훈 주교는 “수원교구는 교구 관련 순교자 198위의 시복시성을 위해 주교회의에 명단을 올려둔 만큼 순교자, 순교성지가 많은 순교자 교구”임을 강조하며 “103위 성인들에게 신앙을 전해준 선조들로서 공경 받아 마땅한 창설 주역의 시복시성 추진과 함께 순교 영성을 꽃피우기 위해 적극적 관심과 실천적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히면서 교구민 모두의 동참을 당부했다. 이어 기조강연을 전한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박정일 주교는 “124위 순교자와 증거자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 청원에 오늘 세미나에서 다룰 이승훈․권철신․권일신 3인은 순교 사실에 대한 확실성의 논란으로 보류되었지만 이들을 배제한 것이 아니라 연구 과제로 남겨 둔 것이기에 오늘 세미나가 더욱 중요한 의미와 중대 과제를 안고 있다”며 오늘 연구를 통해 이분들의 순교사실이 명백히 밝혀지고 시복시성에 이르는 영광을 누릴 수 있길 바란다고 전했다.
   
# 첫 번째 발제자인 원재연 박사(수원교회사연구소)는 이승훈 베드로의 천주교 입문과정, 주요 교회활동, 박해 당시 신앙고백과 관련된 기록들을 살피면서 그의 순교 여부 평판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원 박사는 “한국 교회사 연구에서 이승훈은 교회창립의 원공(原功)과 신앙부인의 원죄(原罪)를 동시에 덮어쓴 인물로 자리매김했지만, 1785, 1791년 두 차례 공개적으로 배교를 선언했지만 일시적 박해 위협에서 벗어나려는 ‘거짓 배교 선언’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그는 “이승훈이 죽음 직전까지 자신의 배교 행위에 대한 회개나 이를 대신할 신앙고백에 대한 교회측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그를 순교자로 쉽게 단정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순교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며 “신앙고백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고, 또 교리를 보급하고 신앙 공동체를 확산시킨 자신이 박해자들의 표적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던 그를 ‘배교자로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단죄하는 것은 성급하고 안이한 판단이라 생각하며 그의 죽음을 둘러싼 평판은 차분히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 ‘천주교 수용과 전파의 토대를 구축한 권철신과 권일신’이라는 주제로 발제한 서종태 박사(호남교회사연구소)는 권철신·권일신 형제가 천주교의 수용 및 전파에 있어 어떤 역할과 공헌을 했는지에 대해 주목했다. 

 서종태 박사는 “세례를 받은 이승훈에 의해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던 당시, 천주교를 대거 수용해 지방 각지의 신앙 공동체의 설립을 주도한 이들이 거의 권철신의 제자이거나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라며, “이들이 천주교 수용을 주도한 것이 스승인 권철신의 유학 사상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보았다. 또 권일신에 대해서는 “가족, 친인척, 형 권철신의 제자들을 통해 복음을 전해 천주교가 사방으로 전파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으며, 밀사를 파견해 북경교회에 보내는 서한을 우리나라 교회를 대표해 작성한 점, 이벽, 이승훈이 1791년 제사를 금하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 때문에 교회를 멀리할 때도 흔들림 없이 교회에 남아 난국을 헤쳐나간 점 등을 꼽아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했다.
 

# 박광용 교수(가톨릭대학교)는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에 대한 발제에서 권철신·권일신에 대한 교회의 귀감 문제를 다뤘다. 

  박 교수는 “권일신은 반대파들에 의해 ‘교주’라고 고발될 당시까지도 사대부로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었던 교회의 기둥”으로, 7차 심문 이후 그가 작성한 ‘회오(悔悟)문’이 배교문자라 문제가 되지만, 당시 박해자들까지 그 회오문으로도 진정한 마음으로부터의 배교 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니 그 이후 행적을 보아야 평가가 가능했으리라고 기록했다는 것과 그의 심복제자들이 이후 성직자 영입을 달성했다는 사실 등을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권철신의 경우 “네 번째 문초 당시 윤유일의 북경 왕래 및 주문모 신부 영입 사실들을 알지만 관에 고하지는 않았다는 ‘지정불고’를 인정했고, 2차 심문 당일에는 30도에 달하는 장을 맞고 난 후유증으로 나흘 뒤 죽음에 이르렀다”며 “‘교회를 떠났다’, ‘사학이므로 (서학을) 배척하여 끊었다’는 그의 이전 언사와 관계없이 시종일관 ‘주재자에 대한 올바른 흠숭’에 대한 일관적 자세를 갖고 자신의 죽을 자리를 찾았다”고 보았다.

 
#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의 생애와 순교사실과 그 평판에 관한 연구’에 대해 발표한 류한영 신부(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는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를 바탕으로「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간행한 ‘달레’의 권일신·권철신·이승훈에 관한 기록 번역본과 원본,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순교자 조사를 행한 ‘다블뤼 주교’의 기록을 모아 정리·분석해 이들 창설주역의 생애, 순교사실과 평판을 살펴보았다.

 류한영 신부는 “다블뤼 주교나 달레가 살았던 시대는 조상 제사와 유교적 가치인 효와 충에 대해 엄격한 신앙의 잣대를 가진 시대였기에 3명의 창설 주역에 대한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의 시야가 좁을 수 있지만, 오늘을 사는 신앙인은 현대적 사고방식으로 새롭게 다가갈 수 있다”며 “17~20세기 초까지 조상 제사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로 동양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많은 고뇌와 혼란을 야기한 점을 참작해야 하며 이들의 삶과 순교에 대한 견해는 보유론적, 종교 화해적 시각을 가질 때 더 긍정적일 수 있다”고 전했다.
 
 
 
# 주도적으로 이번 세미나를 준비해 온 최인각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는 이날 5번째 발제자로서 창설주역에 대한 시복시성을 위한 교회법적 구성요건에 대해 발표했다. 

 “권철신·권일신·이승훈의 신문내용과 결의안을 보면 표면상으로는 신앙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박해자들이 이들에 대해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겉으로만 그렇게 한다’고 증언하고 있기에 ‘그들이 진정으로 신앙을 부정하고 배교했는가’를 반문하면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 최인각 신부는 이들을 “교회를 충실히 유지하는 평신도 사목자로 본분에 충실했다”고 평가했다. 또 이들이 가진 천주에 대한 신앙, 나라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 사목자로서 하느님 백성에 대한 사랑이 종합적으로 이들의 태도에 작용했으며 이들 모두가 상생의 철학과 영성을 갖고 ‘자신과 부모, 임금, 성직자, 신자를 모두 살리기 위한 철저한 삶을 살다가 박해자에 의해 죽음을 당한 초기 교회 지도자이며 순교자’라고 마무리했다.
 
 
# 이날 마지막 발제 ‘이승훈·권철신·권일신의 죽음과 순교 문제 재조명’을 발표한 심상태 몬시뇰(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소장)은 “한국 교회 창설 주역으로서 교회 초석을 놓은 인물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죽음을 둘러싸고 사계 전문가들의 이견 때문에 시성되었거나 시성절차를 밟게 된 후대 순교자들에 비해 맞갖은 존경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밝히며 이들의 죽음과 순교 문제를 국내외 사료 연구를 통해 그동안 국내 교회 안에서 이뤄진 사계 학자들과 교회 관계자들의 견해 주장을 검토하며 신학적 관점에서 재조명했다.

 또한 심 몬시뇰은 1791년 이래 3인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에 주목할 것을 언급하며 “당시 조선 사회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조상제사 금지 훈령’등 그들이 닥친 비상 상황 안에서 제기되는 물음들에 대해 어떤 해명이나 해답도 교회 당국으로부터 들을 수 없는 처지에서 자신들이 이미 숙지하던 유가적 입장에서 심문관들의 질문에 답할 수밖에 없었음을 후손들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사태를 파악해 그들의 발언들을 신앙의 한 표현 양식으로 대하는 자세가 요청된다”고 전했다. 또, “다른 신도들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곧바로 참수형에 처해지거나, 66세의 고령에 장형을 받아 매 맞아 운명하거나 장 100도의 엄형으로 50세 무렵 생을 마감했던 것은 모두가 그리스도 신앙 때문에 그들이 겪어야 한 일들 이었다”며 발제문 말미에서 “박해의 역경을 겪으며 지키려 했던 신앙 때문에 삶을 끝내야 했던 한국 교회 창설 주역들이 미처 이룩하지 못한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는 의미에서 그분들의 고결한 삶, 장렬한 죽음에 부합하는 영광의 자리 마련에 우리 후손 모두 적극 동참하게 되길 기원한다”고 마무리 지었다.
 
 한편, 종합토론에서는 세미나에서 다룬 3명의 창설주역의 평가에 대한 여러 각도의 의견들이 나왔다.
 
 조광 교수는 “후손들의 잣대로서 ‘순교’ 혹은 ‘배교’ 식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조상 제사 금지 훈령에 대한 선조들의 입장을 십계명에도 드러난 ‘효의 순종’이라는 개념에서 넓게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견을 제시했고, 차기진 박사는 “창설 주역 3인을 하나로 묶어서 연구하기보다, 동질적인 부분과 아닌 것을 구분하여 3인 각자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또 류한영 신부는 “모든 신앙 선조들이 정약종처럼 순교하길 바라는게 옳다고 보지는 않는다”며 “신앙고백, 순교의 삶에 대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고, 최인각 신부 역시 “신앙의 증거 방식은 모두 다를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고 말하는 한편 “순교자들의 시성은 ‘기존 영성의 재창조’로서 기쁨에 이르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심상태 몬시뇰은 “세종대왕을 위대한 군주로 바라보는 것이 그분이 남긴 훌륭한 업적들 때문인 것처럼, 창설주역들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에 주시해야 한다”며 “3인의 죽음을 배교로 단정하는 게 온당한지 살펴야한다”고 전했다.
 
▼ 19일 세미나에서 6명의 논평자들 (아래부터 차례대로 여진천 신부, 차기진 박사, 조광 교수, 장동하 신부, 배달하 신부, 김성태 신부)
 
 
 

세미나 끝에 전체소감을 전한 최덕기 주교는 “이번 세미나가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이 바라는, 창설 주역의 시성을 위한 새로운 디딤돌이 되길 바라며, 이를 계기로 앞으로 창설주역에 대한 깊고 다양한 연구가 이어져 이분들이 하루 빨리 시성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수원교구는 한국천주교회 창설 주역 시복시성 추진을 위해 2002과 2005년 2차례의 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으며, 현재 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들의 시복시성을 위하여 활발하게 노력하고 있다.
 
 
 
 
 
▲ 한국 순교자 시복시성을 위한 세미나에서 교구장 이용훈 주교(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박정일 주교(이용훈 주교 왼쪽), 최덕기 주교(박정일 주교 왼쪽), 서울대교구 정의채 몬시뇰(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교구 홍보·전산실
이윤창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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