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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고등동성당 노인 성경대학 학생들 일본 나가사키 성지순례 떠나다

작성자 : 전창남 작성일 : 2012-09-21 조회수 : 745
일본 순교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기행문(나가사키 성지순례)
 
1. 일본국 및 일본의 그리스도교 전래
   멀고도 가까운 나라 일본,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중국과도 밀접한 관계가 많은 나라, 제2차 세계대전을 독일, 이태리와 3국 동맹으로 일으키고 하와이를 공습하여 세계를 지배하고 싶었던 일본.
   그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히로히또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일제 36년의 식민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일본은 반성할 줄 모르고 아직까지도 군종 위안부, 독도문제 등으로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후안무치한 나라이기도 하다. 또한 그 옛날 우리의 통신사가 일본에 건너가 전해준 그림 등 온갖 부장품, 식민지 시절 탈취해간 수많은 문화재를 돌려주지 않는 나라 일본,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저들을 용서하고 국제사회에서 관계를 유지하면서 미래를 함께 열어가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또한 있다.
   손자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한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선조들이 쇄국을 하면서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던 역사를 반성하며, 항상 준비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나는 천주교 신자로서 우리의 천주교 전래와 박해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웃나라 일본에 대해 서는 아는바가 별로 없었다. 그러던 차에 수원대리구 고등동본당 주임 현재봉(베드로) 신부님의 배려로 9월 5일부터 7일까지(2박 3일)까지 고등동성당 노인 성경대학 학생 40여 명이 본당의 일부 지원을 받으면서 일본 순교의 성지 나가사키를 순례하고 돌아왔다.
 

 
   일본은 면적이 한반도의 1.7배이며 인구는 1억3,000여 명이다. 가톨릭 신자 수는 448,000여 명, 교구 16개, 본당 798개, 주교·사제·부제가 1,530여 명, 수녀와 수사는 6,200여 명, 신학생 119명 등이 있다.
   일본의 그리스도교는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의한 포교 이후 서일본에서 급속하게 교세를 펴게 되었다. 예수회를 비롯한 교회의 활동도 컸지만, 당시 1세기 이상이나 전란에 휩싸여 있었고, 통일 정권의 정치체제가 지방분권 체제를 취하여 많은 지방 세력자인 영주(다이묘)들이 분권 통치하에 있었던 정치상황의 영향과 서구식 민주국가의 동방무역 활동(포르투갈인의 내항과 통상)의 영향이 컸다.
 
   일본열도를 구성하는 4대 섬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섬인 규슈에 있는 나가사키현은 예수회 본부를 두고 로마 교황을 알현하기 위해 1582년에 천정소년 사절단을 파견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진전과 접착이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 기리시탄(포르투갈어의 그리스도교)의 교세는 한때 35만으로 급속히 늘어났고, 나가사키에는 16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갔던 조선인의 교회 ‘로렌소 성당’이 있었다. 그러나 전국통일을 이루게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1587년 선교사 추방령을 발하고 나가사키를 직접 지배하게 된 후, 1597년 선교사와 신도 26명을 처형하였다(26성인의 순교). 뒤이어 1614년 도쿠가와 막부(덕천막부)가 발한 금교령으로 나가사끼키 교회는 모두 파괴되었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불교로 강제 개종하게 되었다. 이에 불응하는 신자들에게는 철저한 박해가 가해졌으며 1637년 “시마바라의 난”을 계기로 포르투갈과의 교역을 단절하여 일본의 쇄국체제를 완성했다.
   그리스도 신앙을 인도하던 신부들이 없는 가운데, 신도들은 잠복조직을 이루고 세례와 기도를 전승하며, 인적이 드문 산지나 섬에 숨어살며 200년 이상 신앙을 지키는 잠복 ‘기리시탄’ 으로 살아야 했다.
   1865년 일본이 개국한 후 서양과의 문호가 열림으로 그리스도 신앙 재 포교를 위해 일본에 진출한 파리 외방 전교회의 프티쟝 신부와 만나게 된 우라카미의 잠복 기리시탄들이 신앙을 고백하여 현대 가톨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고토, 하라도, 아마쿠사 등의 잠복 기리시탄들도 가톨릭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러나 금교 정책을 계승했던 명치정부는 가톨릭 신앙을 허용치 않고 신도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1873년 금지령의 ‘고찰’을 내리고 그리스도 신앙을 묵인하게 된 후 신도들은 가난하였지만, 교회를 재건하고 현대 가톨릭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교회는 200여년의 고난의 역사를 극복한 그리스도 신앙의 증거이며 그 희망의 증표로 기리시탄의 역사와 숭고한 정신을 지금 입증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상이 일본국 및 그리스도 신아의 개략적인 고찰이었고, 지금부터는 순례 일자별로 일본 순교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 한다.
 
2. 일본 나가사끼 순교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성지순례
   ▴ 9월 5일(수) 05:00시 순례단 42명은 고등동성당 소성당에 모여 인원 점검을 마치고 신부님의 강복을 후 버스에 승차하여 인천공항으로 출발하였다. 간단한 간식과 주의사항을 전달받고 영광의 신비 묵주 기도를 하는 동안 06:00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출국수속을 마쳤다. 08:00시 대한항공기는 이륙하여 09:15분에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으며 입국 수속을 마친 후에 안내해 주실 율리에따 수녀님을 만났다.
 
   예수 성심회 소속인 이건숙(율리에따) 수녀는 우리 일행을 곧바로 호코바루 순교지로 안내하며 본격적인 성지순례가 시작되었다.
   나가사키는 일본에서 공업, 해안 산업도시로, 일본과 한국의 차이점은 차를 탈 때 반대쪽이며 차량도 왼쪽으로 진행하고 시차는 한국과 같다고 말했다.
   한편, 율리에따 수녀는 “순례 시 중요한 것은 순례는 기도이며, 성지만을 다니는데 시간을 잘 지켜야 한다. 화장실 휴지는 반드시 변기에 넣는다”는 등의 주의사항 등을 말해 주었다.
 
   오무라에서 일본식 점심 식사를 맛본 순례단은 호코바루 순교지를 참배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한 후 15:00시에 시마바라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호코바루 순교지는 ‘수주다의 옥포감옥’이라 하며 6평 감옥에 32명까지 사제들만 가두었는데, 서로 비비고 앉을 자리가 없었으며 이중으로 가시 울타리가 둘러져 있고, 감시원이 24시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스피노자 신부, 마태오리찌 신부가 있었는데, 마태오리찌 신부(중국)는 1582 년 선교목적으로 마카오에 입항하고 1601년에 베이징(북경)에 들어가 정주허가를 받았다. 그가 저술한 천주실의는 최초로 그리스도 교리를 중국에 소개한 책으로 오늘날 신을 천주라 부르게 된 원전이다. 스피노자 신부(일본)는 마태오리찌 신부와 1600년도에 로마에서 같이 수학하고 천문, 기하학까지 연구하였다.
 
   스피노자 신부가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서, “오무라에 옥이 모자라 새로운 옥으로 옮긴다. 주님의 집에 가자할 때 기뻤다(시편). 나무로 얽어 흙을 발라지은 8평 정도에 2개의 가시나무 울타리가 있고, 관리원이 24시간 감시한다. 하루에 주먹밥 2개, 촛불이 새나가지 않게 하고 미사 한다. 순교장으로 가는 대합실이며 관상수도원이다”라고 적었다.
 
▴ 시마바라 성 : 신자들이 쌓은 성이다. 시마바라 난은 1637년 조직화된 ‘불만 사무라이들’이 16세의 카리스마가 넘치는 아마쿠사시로를 지도자로 추대하여 세금을 거두러 온 관리를 살해하고 시마바라 남부 백성들과 낭인 사무라이들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켰다.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이 사태를 심각하게 보고 영주들의 군사들을 모아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봉기군은 보급품이 부족해지면서 봉기군이 완전히 전멸해 버리는 것으로 난은 끝났다. 시마바라 난으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37,000여 명이 모두 순교를 당하였다. 일본의 총 순교자는 50,000여 명으로 추정한다.
 
▴ 운젠 지옥 순교지 : 운젠은 제1호 국립공원이며 유명한 온천지대인데, 신자들을 배교시키기 위해 끓는 물이 튀어 오르는 온천에 집어넣어 천국가기 전에 지옥 맛을 보고 가라고 데려왔다고 한다. “지극히 높으신 성체는 찬미 받으소서” 성체를 영할 때 신자들은 마음으로부터 이렇게 기도하라고 율리에따 수녀는 말했다.
 
▴ 오우라 성당 : 이곳은 일본 최고의 서양식 교회 건축물로서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신앙의 역사지이다. 파리 외방 전교회 뿌치잔 신부가 오우라 성당을 짓고 1865년 2월 19일 봉헌식을 가졌다.
   이 성당은 ‘신자 발명교회, 사제 발견교회’라고도 한다. 16세기 말부터 250여 년 간 “7대 동안 박해가 계속된 뒤 로마의 파파(교황)가 보내는 사제가 마루아(마리아)를 모시고 온다” 는 예언을 굳게 믿으며 가쿠레 기리시탄의 후손들은 사제를 기다려왔다. 이후 구전으로 전해온 사제를 확인하는 여러 가지 질문에 성의껏 대답한 뿌치잔 신부에게 이사벨라 여인은 귓속말로 “당신 마음과 내 마음이 같습니다. 여기에 온 우리는 모두 숨어사는 신자들입니다. 우라카미와 다른 곳에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라고 자신들이 가쿠레 기리시탄임을 고백했다고 한다.
   보편 교회의 교계제도와 성모신심을 묻는 핵심 질문을 통해 사제와 신자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비밀 조직체를 가지고 신자가 신부를 찾으러 간 교회이며, 기도, 교리, 전례가 있었기에 일본 교회의 기둥이었다.
 
▴ 26성인 순교지 니시자카 : 1597년 바오로 미키는 십자가에 달린채로 마지막 설교를 한다. “내가 말하는 것을 잘 들으시오. 나는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했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나는 이 이유 때문에 죽는 것이며, 죽는 것을 기뻐하고 이것은 하느님께서 내게 내려주신 커다란 은혜입니다.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들을 속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구원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단언하고 주저하지 않고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원수,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하라고 가르칩니다. 나는 국왕(히데요시)과 나를 사형에 처하는 모든 이들을 용서합니다. 국왕에 대한 증오도 없고, 오히려 그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라고 말하고 순교를 한 곳이다.
 
▴ 26성인 비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프란치스코회 6명, 예수회 3명, 일본인 신자 17명을 나가 사끼 니시자카에서 십자가에 매달아 책형에 처했다. 이들은 1862년 성인반열에 오르고 성인들 의 시성 100주년을 맞이한 1962년 6월 10일 이곳에 기념비가 완성되었다.
 
▴ 26성인 기념관 : 초기 일본 선교사들의 유품과 순교성인들의 유품, 순교 당시의 형틀 등이 진열되어 있고, 유해소가 안치되어 있다. 포르투갈 왕에게 보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편지 와 성화들, 성상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당시 기리시탄이 기도할 때 그리스도 상을 대신해 쓰던 것으로 알려진 조선시대의 불상이 있다.
 
▴ 성 필립보성당(26성인 기념성당) : 나가사키 순교지가 내려다보는 곳에 성당이 서 있다. 나가사키의 많은 신자들은 26성인과 함께 이곳에서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상징적인 두 개의 탑은 불길과 같이 높이 솟아있는데, 하나는 기도가 하늘에 오르는 것을 표현하고, 나머지 하나는 하느님으로 부터의 은총이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26성인 성당에서 미사를 드린 현재봉 신부는 강론을 통해, “우리 모두 성인이 되자”고 운을 뗀 후, “하느님 나라에 가기가 얼마나 험난한 지 이곳 나가사키에 와서 보고 느꼈다”고 말했다. 성 필립보성당 주임 아질라 신부는 “이 성당이 시설된 지 150주년이 되고 필립보 성인에 봉헌된 성당”이라며, “이곳에서 12세부터 64세까지 신자들이 순교했다”고 말했다.
 
▴ 우라카미 주교좌성당 : 우라카미 성당은 2차 세계대전 때 원폭투하 지점이다. 1945년 8월 9일 원폭으로 성모 승천 대축일을 준비하던 신자 24명과 사제 2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신자 12,000명 중 8,500명이 원폭피해로 사망했다.
   30년이 걸려서 지은 주교좌성당은 20년 만에 원폭피해로 폐허가 되었으나, 지금은 원형에 가깝게 재건되었다. 7만4천 명이 사망한 나가사키 주교좌성당에 종이 살아남았고, 목각 성모님이 눈과 얼굴에 화상을 입었으나 살아남아 전시되어 모셔져 있다. 성당 내부에는 희생당한 8,500명 신자들의 이름이 벽면에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해마다 평화 기원제가 열리고, 매일 “나가사키의 종”이 시내 전역에 울려 퍼지며 하느님 신앙을 알리고 있다.
   일본 천주교회는 유명 순교자만 1만 여명이고, 무명 순교자를 합하면 5만 여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순교 복자는 393위이며, 이중 조선인 15인이 순교 복자위에 올라있다.
   나가사키의 다까미 주교는 한·중·일 주교회의 및 국내행사에서 “일본은 전범국으로서 아시아 및 세계에 사죄해야 한다. 정치권에서 회재하지 않기 때문에 다까미 주교가 일본을 대신하여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고 중국에서 사목활동을 하신 현재봉 신부와 율리에따 수녀가 말했다.
 
▴ 야마타성당 : 야마타 성당에는 이키쯔키(잠복신앙) 출신으로 니시사카에서 처형된 16성인의 한 사람인 성 토마스 니시가 성인품에 오른 것을 기념하여 건립한 비가 경내에 있으며, 나가사키 주교구가 추진하는 42개소 순례의 출발지이다.
   쿠로시마의 신자들은 이키쯔키의 잠복 기리시탄에게 가톨릭이 되도록 권유하지만, 이들은 응하지 않고 잠복 기리시탄으로 신앙을 유지하고 이어가고 있다.
   유네스코 문화재 후보지인 이키쯔키의 본당 야마타성당 천장에는 나비모양의 날개로 7성사를 상징하는 특이한 미술품이 있다. 현재봉 신부는 남미에도 잠복 신앙이 있으며, 점차 늘어가는 추세인데 어떤 신앙이 옳은 것인지는 하느님이 판단하실 일이라고 말했다.
 
   일본 순례를 끝으로 하는 이 성당에서 신자들은 재배한 고구마 구이와 과자, 떡, 음료수 등을 한국 순례자들을 위해 마련해 주었다. 우리는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순례를 종료하고 후쿠오카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밤 12시경에 고등동성당에 도착한 노인 학생들은 피로함도 잊은 채 순례가 자신을 돌아보고 영적으로 성숙되어지는 좋은 순례였다고 입을 모으며, 성당에서 기념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마중 나온 자녀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 일본의 기원은 약 1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원시 인류가 동부 시베리아에서 사할린 섬과 일본 북부지방으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은 상징적인 존재인 천황을 중심으로 실제 실권을 잡고 있는 수상을 중심으로 하는 의원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천황은 상징적 원수로 일본 헌법에는 일본국 및 일본 국민의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되어 있다.
 

전창남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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