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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1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6-02-19 조회수 : 138

루카 9,22-25 

 

내가 나를 죽일 수 없어서 그분이 오셨다  

 

 

교우 여러분, 사순 시기의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되는 오늘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 당혹스러운 명령을 하나 내리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자신을 버리라는 것, 그러니까 자아를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한번 솔직해져 봅시다. 세상에서 제일 안 죽는 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나'라는 놈입니다.

우리는 평생 이 '나'를 위해 돈을 벌고, 옷을 입히고, 맛있는 걸 먹입니다.

어떻게든 남들보다 잘나 보이게 하려고 안달복달하며 살죠.

그런 나를 내가 죽이라니요?

이건 마치 내 손으로 내 목을 졸라야 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실 '자아'가 고통의 원인이라는 걸 가장 먼저 간파한 건 불교입니다.

불교는 모든 괴로움이 나에 대한 집착에서 나오니, 수행을 통해 자아를 텅 비워버리는 '공'의 경지에 이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자기 힘으로 깨달음을 얻으려고 산으로 가고 벽을 보고 앉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다릅니다. 그리스도교는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인간은 절대로 혼자 힘으로 자아를 죽일 수 없다"고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아가 자아를 죽이려고 시도하는 순간, '자아를 죽이려 노력하는 아주 거룩한 나'라는 더 크고 괴물 같은 자아가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삼사라'입니다. 

 

주인공 타시는 오랜 수행으로 자신을 죽이려 하지만, 수행이 끝나고 세상에 나오자 욕망도 다시 살아납니다.

그런 그를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건 고행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게 된 여인과 자녀들이었습니다.

그가 다시 승려의 길로 돌아가려 할 때, 아내가 그를 붙잡으며 묻습니다.

"부처가 고귀하다면, 그를 위해 버려진 아내와 아이들은 무엇입니까?"

타시는 이 사랑의 관계 안에서 '홀로 거룩해지려는 나'라는 가짜 자아에서 비로소 해방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 의지만으로는 이기심이라는 감옥을 탈출할 수 없습니다.

수술 집도의가 자기 뱃속에 있는 암세포를 직접 도려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신 겁니다.

내 힘으로 죽일 수 없는 나의 교만과 탐욕을, 그분의 사랑이라는 수술 칼로 직접 치료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요?

답은 오직 '사랑'에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죽는 건 의지가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는 그 사람의 크기 때문입니다.

아이 키우는 어머니들을 한번 보세요.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그녀들은 잠도 많고, 꾸미는 것 좋아하고, 맛있는 건 먼저 먹던 '자기중심적인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그 여자는 죽습니다.

새벽에 아이가 울면 천근만근인 몸을 벌떡 일으키고, 자기는 굶어도 아이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가 부릅니다.

누가 시켜서 할까요? 아닙니다.

아이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 아이라는 존재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나'라는 존재가 자연스럽게 밀려 나가는 겁니다.

아이 때문에 엄마가 죽는 것이고, 그 희생을 먹고 아이는 어른이 됩니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성녀 가타리나의 일화는 이 신비를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성녀는 주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 이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성녀의 저서 『대화』를 보면, 주님께서 가타리나에게 마음속에 작은 방 하나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방의 이름을 '자기 지식의 방'이라고 부르게 하셨죠.

성녀는 이 방에서 자신이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가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제 그 방에서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누구인지를 보아라." 

 

성녀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0이라면 하느님은 무한대라는 사실을요. 내가 나를 죽이려고 고통스럽게 고행하는 것보다,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가만히 바라보는 순간 내 보잘것없는 자존심은 안개처럼 사라졌습니다. 성녀는 이 사랑 안에서 내면의 평화를 얻었고,

나중에는 교황님을 설득해 로마로 돌아오게 하는 담대한 용기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결국 어떻게 해야 나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고 참 행복을 얻게 될까요?

나를 만드신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신비를 가장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요한 복음서 21장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베드로가 만나는 장면이죠. 주님께서는 세 번이나 당신을 배반한 베드로에게

"너 그때 왜 그랬니?"라고 따지지 않으십니다. 대신 아주 단순하지만 본질적인 질문을 딱 하나 던지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5)

이 질문은 베드로의 가슴 속에 남아있던 자책과 수치심을 단번에 무너뜨렸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자기의 의지력이나 결단력을 믿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요한 21,17)라고 고백합니다.

이 순간, 비겁했던 옛 시몬은 죽고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베드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자아를 정복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성격이 도무지 고쳐지지 않아 괴로우십니까?

내 안의 이기심이 죽지 않아 실망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나를 죽이려고 스스로 채찍질하는 대신,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십자가를 더 깊이 묵상하고, 그분이 나를 위해 흘리신 눈물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께 완전히 매혹될 때, 나라는 감옥의 문은 저절로 열립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을 멸시하는 데까지

이르면 지상의 도성이 되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자신을 멸시하는 데까지 이르면 천상의 도성이 된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내 힘으로 나를 죽이려고 너무 애쓰지 맙시다.

대신 나를 위해 죽으신 그분의 십자가 앞에 더 오래 머무릅시다.

그분의 사랑이 너무나 커서, 내 안의 욕심과 교만이 비좁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도망가게 만듭시다.

스스로를 죽일 수 없기에 우리에게 오신 그분을

기쁘게 맞이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나를 잃고 하느님을 얻는 진정한 부활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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