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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6-03-26 조회수 : 133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요한 8,51-59 
 
우리는 언제 비로소 하느님을 참으로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과 "아버지를 아는 것"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이십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느님을 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십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요한 8,55)
그러시면서 충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나는 있는 나다." (요한 8,58)
여기서 '나는 있는 나다'는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인 '에고 에이미(Ego Eimi)'입니다.
즉, 예수님은 당신의 본성이 하느님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같은 본성'을 공유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원숭이의 본성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하루 종일 나무 위를 다니며 바나나를 까먹고, 본능적인 욕구에만 충실합니다.
그런데 그의 품속에는 위엄 넘치는 사자의 사진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그 사진을 보며 "이분이 내 아버지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사자의 용맹함, 사자의 포효, 사자의 고귀한 기질은 전혀 닮지 않은 채 원숭이처럼 살면서
사진 한 장 가졌다고 사자를 아버지로 안다고 우기는 것은 기만입니다. 
 
유다인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지만, 본성은 인간이거나 거의 짐승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본성은 자기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모든 욕구는 본성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본성은 ‘두려움’ 속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납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사자 가죽을 쓴 당나귀』 이야기는 이 위선의 결말을 잘 보여줍니다.
어느 날 당나귀가 사냥꾼이 버리고 간 사자 가죽을 발견합니다.
그는 그것을 뒤집어쓰고 마을로 내려가 모든 동물을 겁주며 사자의 권위를 즐깁니다.
나중엔 자신이 정말 사자가 된 줄 알았고, 사자를 정복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에게 들켜 귀를 잡히고, 사자 가죽이 벗겨지며 결정적인 순간에 사자의 포효가 아닌 당나귀의 울음소리를 내뱉고 맙니다.
우리가 두려움이 생긴다면 그만큼 거짓의 정체성 가죽이 벗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버지를 참 아버지로 알아갈까요?
이것을 알면 됩니다.
아버지는 ‘다~’ 주신다는 것을 확신함으로써. 영화 '닥터 지바고' (1965)의 마지막 장면은 이를 눈물겹게 보여줍니다. 
 
예브그라프 장군은 조카인 타냐를 찾아냅니다. 타냐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모를 잃고
거칠게 살아온 노동자 소녀였습니다. 예브그라프가 묻습니다.
"너의 아버지는 언제 잃었지?"
타냐가 대답합니다.
"불이 났을 때요... 모든 게 혼란스러웠던 그날 밤이었죠."
예브그라프가 다시 묻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니?" 타냐는 고개를 떨굽니다.
"아버지가 제 손을 잡고 뛰었는데... 제가 그만 아버지의 손을 놓쳐버렸어요.
군중 속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렸죠." 
 
이때 예브그라프는 타냐의 눈을 똑바로 보며 진실을 말해줍니다.
"아니, 타냐. 너의 아버지는 유리 지바고란다. 그는 위대한 의사였고 시인이었지. 그리고 하나만 기억해라.
아버지는 절대로 딸의 손을 놓지 않는단다. 네가 무서워서 아버지의 손을 놓은 것이지, 아버지가 너를 버린 게 아니야." 
 
자신이 그저 길거리에 버려진 이름 없는 노동자가 아니라, 고결한 영혼을 가졌던 유리 지바고의
혈육임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전율합니다.
이전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첫 발을 내딛습니다.
어쩌면 시를 쓰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출처: 영화 '닥터 지바고' 1965) 
 
저도 성체를 영할 때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시는 음성을 듣고는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다 주시는 분 앞에서 “당신은 하느님이시지만, 나에겐 하느님이라고 할 본성은 주지 않셨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유다인들은 그렇게 다 줄 수 없다고 하며, 자신이 하느님이 된다는 말을 금지시켰습니다. 
 
성경에서 이 정체성의 회복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인물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덤가에 서 계실 때, 마리아는 그분을 보고도 정원지기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한마디를 던지십니다. "마리아야!" (요한 20,16) 
 
이 짧은 부름은 창세기의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던 그 권능의 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이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부르는 자와 불리는 자가 같은 본성 안에서 소통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는 순간, 마리아의 영적 시력은 하느님 수준으로 격상됩니다.
그녀는 즉시 "라뽀니!"라고 외칩니다. 이 말은 '나의 스승님'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인간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고, 오직 하느님의 자녀만이 하느님을 스승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요한 20,17)는 위대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우리의 아버지가 같음을 선포하시며, 마리아를 '죽은 자를 찾는 여인'에서
'부활을 전하는 사도'로 재창조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알게 된 마리아는 이제 더 이상 죄인의 본성으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딸이라는 본성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출처: 『주석 성경』 요한 복음 20장) 
 
우리는 내 정체성이 진짜 하느님임을 깨닫고, "나도 하느님처럼 할 수 있다"고 고백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하느님 능력을 발휘할 때 비로소 하느님을 진정으로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다고 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해?", "어떻게 기적을 믿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아직 아버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원숭이 본성에 갇혀 사진만 구경하는 상태입니다. 
 
서기 452년, ‘하느님의 채찍’이라 불리던 잔인한 정복자 아틸라가 훈족 대군을 이끌고 로마 턱밑까지 쳐들어왔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와 군대는 겁에 질려 도망쳤습니다.
그때 레오 대교황은 무기도 없이, 군대도 없이 홀로 아틸라를 만나러 나갔습니다. 
 
교황은 아틸라 앞에 서서 눈을 똑바로 보며 꾸짖었습니다.
"그대는 하느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일을 멈추시오!" 놀랍게도 그 잔인한 아틸라가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말머리를 돌려 퇴각했습니다.
훗날 부하들이 왜 도망쳤느냐고 묻자 아틸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황의 등 뒤에서 칼을 든 거대한 천사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인간 레오가 아니라,
하느님의 본성을 입은 자의 위엄에 압도당했다."
레오 대교황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기에, 하느님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결과 제국을 구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출처: 체사레 바로니오, 『교회 사략』; 몬테소리, 『성인전』) 
 
입으로만 아버지를 부르는 가식에서 벗어납시다. "아버지는 결코 내 손을 놓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고, 내 안에 감추어진 신적인 본성을 일깨웁시다.
진정으로 아버지께 “다~” 받았다고 믿고 고백하고 행동할 수 있을 때, 그래서 세상을 이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참 자녀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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