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지 주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당신 곁에 교만한 사람이 많다면 당신이 겸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지내며 가장 거룩한 주간인 성주간의 문을 엽니다.
오늘 전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방금 전까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며 환호하던 군중의 함성이, 잠시 후 수난 복음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서슬 퍼런 증오의 비명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이 변덕스러운 군중을 비난하곤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 장면의 본질은 군중의 변덕이 아니라 예수님이 선택하신 '입성의 방식'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군마를 타고 칼을 휘두르는 정복자가
아니라, 볼품없는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마태 21,5)
왜 하느님이신 그분은 이토록 낮은 모습으로 오셨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질병인 '교만'을 치료할 유일한 약이 오직 '겸손'뿐이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자기를 믿는 병이고, 겸손은 나귀를 타고 상대의 발밑으로 내려가는 십자가입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만 우리는 타인의 자아라는 더러운 겉옷을 벗길 수 있습니다.
교만이라는 단단한 바위는 정으로 때려 부수려 할수록 더 강하게 저항합니다.
타인의 교만을 꺾어보겠다고 논리로 이기려 하거나 힘으로 누르려 하면, 상대의 자아는
더 단단한 갑옷을 입습니다.
오직 겸손만이 그 바위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고대 지혜서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오만한 왕이 자신의 행차를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보고 분노했습니다.
왕은 병사들에게 명하여 칼과 도끼로 바위를 내리치게 했지만, 칼날만 부러질 뿐 바위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좌절하고 있을 때 한 현자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대왕이여, 바위를 때리지 마시고 그 밑으로 물을 흘려보내십시오."
현자는 바위틈과 그 주변 흙 밑으로 끊임없이 물을 흘려보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물은 바위를 지탱하던 바닥의 흙을 야금야금 깎아내며 바위 밑으로 깊숙이 스며들었습니다.
결국 바닥이 허물어지자, 그 거대한 바위는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힘없이 굴러떨어졌습니다.
겸손은 이 물과 같습니다. 상대의 자존심 밑으로 흐르며 그 마음의 뿌리를 적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귀를 타고 상대의 발밑으로 내려갈 때, 비로소 상대의 완고한 교만은 쓸려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이 겸손의 위대함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바로 옆에서도 얼마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미국 시카고의 빈민가 학교에 부임한 레비 소프(Levi Thorpe) 교사의 실화는 더 구체적인 감동을 줍니다.
그의 반에는 '짐승'이라 불리는 열 살 소년 케빈이 있었습니다.
아이는 욕설을 입에 달고 살았고, 친구들을 때리는 것은 물론 선생님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습니다.
징계와 체벌은 아이를 더 난폭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소프 선생은 방식을 바꿨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교실 문 앞에 서서 케빈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나타나면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케빈의 풀린 신발 끈을 직접 묶어주었습니다.
아이는 처음엔 "더러운 손 대지 마!"라며 선생님의 어깨를 발로 찼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이의 발치로 내려갔습니다.
한 달이 지났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날도 선생님이 신발 끈을 묶어주기 위해 무릎을 꿇자, 케빈이 갑자기 선생님의 목을 껴안고 오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잘못했어요.
한 번도 누가 제 발 앞에 무릎을 꿇어준 적이 없었어요.
저 같은 놈도 사랑받을 수 있나요?" 겸손이 거울이 되어 케빈의 난폭함 속에 숨겨진 상처와 교만을 비추었을 때, 아이는 비로소 자신의 더러운 겉옷을 벗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출처: 시카고 트리뷴 교육 칼럼, 미담 재구성)
성인들의 삶은 당연히 겸손의 삶입니다. 겸손의 삶이 십자가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아르스의 성 요한 비안네 신부님을 시기한 한 신부가 모욕적인 편지를 보냈습니다.
"비안네, 당신은 신학 지식도 부족하고 교회의 수치다. 당장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거나 분노했겠지만, 비안네 성인은 고해소의 낮은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이렇게 답장을 썼습니다.
"사랑하는 신부님, 당신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사실 저는 당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무식한 죄인입니다.
저처럼 부족한 자를 참아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저의 실체를 일깨워 주신 형제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에게도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이렇게 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겸손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부끄럽습니다.
이 답장을 받은 신부는 전율했습니다. 비안네 성인의 '압도적인 겸손'이 거울이 되어, 자신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추악한 시기와 교만을 적나라하게 비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부님을 찾아와 발치에 엎드려 고백했습니다.
"신부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겸손 앞에서 제가 얼마나 끔찍한 괴물인지 보았습니다."
겸손이라는 거울이 없으면 사람은 자신이 교만한 줄도 모르고 날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발밑으로 내려오신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그 거울이 되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출처: 프란치스코 트로슈, 『아르스의 성자 요한 마리아 비안네』)
나의 겸손으로 타인의 교만이 죽는다면, 그렇게 나의 나귀 밑에 그들의 겉옷이 깔린다고 무엇이 좋을까요?
내가 행복해집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직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베드로는 호언장담했습니다.
"모두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마태 26,33) 이것은 자기를 믿는 극도의 교만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와 말싸움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무릎을 꿇고 그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실
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이나 배반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지만, 그의 교만 앞에서 겸손의 거울을 들이대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닭이 울었을 때, 그는 비로소 예수님의 그 눈길과 마주칩니다.
그때 베드로가 본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단죄하는 판사의 눈이 아니라, 발을 씻어주던 그 겸손한 스승의 눈이었습니다.
그 겸손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추악하고 나약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거울 때문에 무너져 내렸고,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습니다.
그 통곡의 눈물이 베드로의 교만했던 겉옷을 다 적셔 벗겨내었고, 그는 비로소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교회의 반석으로 거듭났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순종으로 그런 겸손한 제자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겸손해질 때, 우리는 단순히 십자가를 참는 자가 아니라 '사람을 얻는 자'가 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상해』에서 이렇게 명확히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 겸손하게 되신 것은 여러분이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으나, 그 길은 오직 주님이 걸으신 겸손의 길뿐입니다." (St. Augustine, Enarrationes in Psalmos, 118, 15).
또한 그는 강조했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기초입니다.
그 건물이 아무리 높다 할지라도 기초가 겸손이 아니라면 그것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Sermo 69, 2).
이번 성주간,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나귀를 타고 낮은 곳으로 내려갑시다.
이웃의 신발 끈을 풀고 발을 씻어줍시다.
내 자아를 꺾어 타인을 살리고, 원수를 친구로 바꾸는 이 겸손의 신비가 바로 여러분 인생의 가장 큰 부활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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