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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6-05-01 조회수 : 88

요한 14,1-6  
 
일과 싸우지 않으면 죄와 싸워야 한다 
 
 
오늘 5월 1일, 교회는 노동자 성요셉을 기념합니다.
세상도 오늘을 노동절로 지냅니다.
그런데 세상이 노동을 바라보는 방식과 교회가 노동을 바라보는 방식은 많이 다릅니다.
세상은 노동을 자주 짐으로 봅니다.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 가능하면 적게 하고 많이 받아야 하는 것, 돈만 충분하면 벗어나고 싶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노동이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부당한 임금, 과로, 착취, 경쟁, 인간을 부품처럼 대하는 구조가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죄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한 가지 결론을 너무 쉽게 내려 버렸습니다.
‘일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필요악이다.
일은 사람을 망가뜨린다.
그러니 행복은 일하지 않는 데 있다.’ 정말 그럴까요? 
 
오늘 강론의 제목은 이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일과 싸우지 않으면 죄와 싸워야 한다.
이 말은 쉬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중립이 되지 않습니다.
밭을 가꾸지 않으면 그냥 빈 땅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잡초가 자랍니다.
방을 치우지 않으면 그냥 방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먼지가 쌓입니다.
마음도 그렇습니다.
손이 선을 만들지 않으면 상상력이 악을 만듭니다.
시간이 하느님께 봉헌되지 않으면 시간이 나를 잡아먹습니다.  
 
일은 저주가 아니라 창조 때부터 주어진 소명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도 일하시니 당신도 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이것을 가르칩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죄 이후의 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땀 흘림의 고통은 죄 이후에 심해졌지만, 일 자체는 타락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노동은 저주가 아니라 하느님을 닮기 위한 소명입니다.
다만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한 일은 타락의 길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는 일부터 말입니다. 
 
왜 일을 하면 하느님을 닮을까요? 행복은 자존감입니다.
그런데 자존감은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라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참된 자존감은 ‘나는 하느님과 닮았어.’에서 옵니다.
하느님은 영원히 창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있는 부모는 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일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순명은 감상적인 순명이 아니었습니다. 책임지는 순명이었습니다.
먹이고, 보호하고, 데리고 피신하고, 다시 돌아오고, 집을 세우고, 일해서 가족을 살리는 순명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만일 요셉이 일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하느님께서 성모님과 예수님을 그에게 맡기셨을까요? 물론 하느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시는 기준은 세상의 능력주의와 다릅니다. 하느님은 부자를 고르시는 것도 아니고,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고르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에게 책임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은총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지만, 인간의 책임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마술이 아닙니다.
은총은 게으름을 거룩함으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먼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용서받는 존재이기에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단지 마음씨가 좋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뜻 앞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신비 앞에서 도망칠 수도 있었습니다.
헤로데의 위협 앞에서 주저앉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집트 망명 생활의 고단함 속에서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움직였습니다.
천사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하자 그는 일어났습니다.
“아기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하자 그는 밤에 일어나 떠났습니다.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 하자 다시 움직였습니다.
요셉의 순명은 늘 발과 손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출처: 마태 1,20-24; 마태 2,13-23) 
 
사랑은 감정만으로 사람을 지키지 못합니다. 사랑은 일해야 합니다.
아기를 사랑한다면 밤에 일어나야 합니다.
부모를 사랑한다면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합니다. 공동체를 사랑한다면 청소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맡겨진 일을 해야 합니다.
일하지 않는 사랑은 결국 말뿐인 사랑이 됩니다. 
 
다윗의 이야기가 이것을 무섭게 보여 줍니다. 성경은 다윗의 죄를 소개할 때 이상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해가 바뀌어 임금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었다.” 그런데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뭅니다.
그는 저녁때 잠자리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밧 세바를 봅니다.
그리고 죄가 시작됩니다.
간음, 거짓말, 살인, 은폐. 한순간에 무너진 것 같지만 사실 그 시작은 눈이 아니었습니다. 시작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싸워야 할 전쟁터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싸우지 말아야 할 욕망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졌습니다. (출처: 2사무 11장)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누워 있을 때 마음은 맑아집니까?
아니면 휴대폰을 만지며 비교하고, 불평하고, 음란한 상상에 빠지고, 남을 판단하고, 자기연민에 젖습니까?
몸은 쉬는데 영혼은 더 피곤해지는 경험을 우리는 압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은 창조하고, 돌보고, 사랑하고, 내어줍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그는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본성에서 멀어집니다.
저도 사실 쉬는 날도 무엇을 해야 할 지 하루 일과를 짜 놓습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선택에 먹힙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그의 단편 「악마와 빵 조각」(1886)에서 노동과 죄의 상관관계를 기막히게 묘사했습니다.  
 
한 가난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가진 것도 많지 않았고, 먹을 것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자기 밭을 갈았습니다. 자기 손으로 땅을 일구고, 자기 땀으로 하루를 버티는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쉬려고 밭둑에 앉아 빵 조각을 먹으려 했는데, 그 사이에 작은 악마가 몰래 다가와 그 빵 조각을 훔쳐 갑니다.
작은 악마는 기대했습니다. 
 
‘이제 저 인간이 화를 내겠지. 욕을 하겠지. 하느님을 원망하겠지.
그러면 내가 이긴 것이다.’
그런데 농부는 빵이 사라진 것을 보고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져간 자가 배가 고팠나 보지.”
그리고 허허 웃고는 다시 밭으로 돌아가 일을 시작합니다. 
 
이 장면이 중요합니다.
왜 농부는 악마에게 지지 않았습니까?
빵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마음이 한가해서도 아닙니다.
그는 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손으로 오늘을 감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 요셉의 두 가지 특징은, 의로움과 일을 사랑함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가르침을 오늘의 말로 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노동은 죄를 씻는 세례수와 같고, 게으름은 죄를 낳는 자궁과 같다.
일하는 손은 천사의 손이 되고, 노는 손은 악마의 놀이터가 된다.
그대가 땀 흘릴 때, 하느님께서는 그대의 땀방울 속에 당신의 은총을 섞어 주신다.”
(출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창세기 강론』의 노동과 나태에 관한 교부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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