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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1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6-05-19 조회수 : 103

요한  17,1-11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시는 이유 
 
 
"영원한 생명은 오직 한 분이신 참하느님을 알고, 또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중략) 저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어 알려 주었습니다." (요한 17,3.6) 
 
찬미 예수님! 부활 제7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바로 코앞에 두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바치시는 그 유명한 '대사제의 기도'입니다.
이 거룩한 기도문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지를 이렇게 요약하십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아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매일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외칩니다.
도대체 하느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준다는 것일까요?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라고 부르든, 엘로힘이라고 부르든 그 호칭 몇 개를 외우는 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닐 것입니다.
이 깊고도 위대한 신비를 깨닫기 위해, 먼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일상 풍경 하나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요즘 공원이나 거리를 나가보면, 유모차에 아기 대신 예쁜 강아지를 태우고 산책하시는 분들을
참 많이 봅니다.
반려견을 키우시는 분들은 강아지를 향해 자신을 '엄마' 혹은 '아빠'라고 부릅니다.
"우리 아기, 이리 와! 엄마가 간식 줄게! 아빠한테 뽀뽀!"
강아지에게 최고급 옷을 입히고, 유기농 간식을 먹이며, 자신의 모든 사랑을 다 쏟아붓습니다.
강아지를 정말 자기 친자식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강아지를 아무리 친자식처럼 사랑한다고 해도, 세상의 어떤 보호자도 강아지를 앞에 앉혀놓고 이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자, 뽀삐야, 잘 들어라. 내 진짜 이름은 김철수야. 그리고 내 주민등록번호는 이거고, 내 통장 비밀번호는 1234란다.
오늘부터 나를 김철수라고 부르렴!" 
 
왜 강아지에게는 자신의 진짜 이름과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을까요?
알려줘 봐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아지는 아무리 똑똑해도 인간의 언어로 그 이름을 부를 수 없고, 통장 비밀번호를 알아도 은행에 가서 돈을 찾을 수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강아지는 평생을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고 자란다 해도 결국 '개'일 뿐, 결코 '인간(나)'으로 성장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본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똑같은 존재가 될 수 없는 대상에게는, 굳이 내 모든 것이 담긴 '이름'을 내어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자녀에게는 다릅니다.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부모는 가장 먼저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자녀를 자신의 가족관계증명서(호적)에 당당히 올려 자신의 성과 이름을 물려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자녀는 내 살과 피(DNA)를 물려받아, 언젠가는 나와 똑같은 생각과 권리를
가진 완벽한 '인간'으로 자라날 것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은 "너는 나와 똑같은 본성을 가진 나의 후계자이며, 내 모든 것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다"라는 가장 강력한 선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저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습니다"라고 기도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과거 구약 시대에 하느님은 우리를 마치 당신이 기르시는 애완동물이나 피조물 정도로 대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죄악에 물든 짐승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감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본성에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라는 네 글자가 성경에 나오면, 감히 그 이름을 발음조차 하지 못하고 '아도나이(나의 주님)'라고 얼버무려 읽어야만 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절대로 함부로 풀 수 없는 무서운 암호(Code)로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굳게 잠겨 있던 그 영적 암호를
완벽하게 해독(Decryption)해 버리셨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단순히 무서운 심판관이 아니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다정한 '아빠(Abba)', 즉 무한히 내어주시는 '사랑의 본성'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인 당신이 그렇게 “나는 나다”라는 하느님 이름을 당신 자신에게 붙일 수 있었던 것처럼, 실로암에서 눈이 떠진 태생소경도 “나는 나다”라고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이것만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 자존감대로, 정체성대로, 믿는대로 성장합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교부이신 성 아타나시우스 주교는 이 기막힌 구원의 신비를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이유는,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출처: 성 아타나시우스, 『말씀의 강생에 관하여』). 
 
이단 같은 소리로 들리십니까? 아닙니다.
이것이 가톨릭 교의신학의 핵심인 '신화(Deification, 하느님화)'의 교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아빠, 아버지가 될 수 있도록 예수님을 통해 그분의 이름을 알려주신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해질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느님과 같은 신적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탈출기 3장을 보면 이 위대한 이름의 능력이 모세의 삶에서 어떻게 폭발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느님이 모세를 부르셨을 때, 모세는 두려움에 떨며 묻습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그분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마침내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나는 있는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파견하셨다 하여라." (탈출 3,14). 
 
하느님의 이름을 전수받기 전까지, 모세는 이집트에서 도망쳐 양이나 치던 겁쟁이 살인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이집트로 돌아가는 순간, 모세는 더 이상 찌질한 도망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파라오 앞에 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보아라, 나는 네가 파라오에게 하느님처럼 되게 하겠다." (탈출 7,1). 
 
모세가 파라오 앞에서 지팡이를 들어 바다를 가르고 재앙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자신의 영혼에 장착했기에, 그는 파라오 앞에서 피조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위를 대행하는 '또 다른 하느님'으로
격상되었던 것입니다. (출처: 『주석 성경』 탈출기 7장). 
 
우리는 세례를 통해 우주 창조주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한 '이름'을 물려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돈 몇 푼 손해 보았다고 잠을 못 자며 분노하고, 자존심 조금 상했다고 형제와 등을 돌리며 미워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두려워 늘 세상의 쾌락과 타협하며 비겁하게 도망치려 합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피를 다 쏟아부어 너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주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아직도 길거리를 떠도는 짐승처럼 두려움에 떨며 살고 있느냐?
당장 그 위대한 하느님 자녀의 이름을 버리든가, 아니면 지금 당장 돌아서서 네 이름에 걸맞게
당당하고 사랑 넘치게 살아라!"  
 
여러분은 아버지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강아지가 아닙니다.
우주의 상속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신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처럼 이 세상을 자비롭게 다스리라는 위대한 파견 명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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